20080721

#1.

한달 전 쯤, 내가 집이나 전철역을 벗어남과 동시에 타이밍 맞춰 비가 주룩주룩 내렸던 아주 얄미운 날이 있었다. 이 빗속을 뚫고 머나먼 길을 따라 과외집으로 향하려니 내 안에 잠재해있던 귀차니즘이 양심에게 아웅다웅하자고 난리였다. 내 안에서 신나게 싸우는 와중에 날아온 문자 한 통.

"선생님 오늘 비 많이 오는데 괜찮으세요?"

괜찮을리가, 라고 하고 싶지만 역시 답장은 씩씩하게.

"비 온다고 내가 쓰러지디 ㅋㅋ 무슨 일이라도 있는거 아녀?"
"아니요, 그냥 선생님 힘드실 거 같아서 내일로 옮길까 해서요."

진실은 저 너머에(...)라고는 하지만
문자로라도 선생의 마음을 헤아리는 감동의 도가니탕에 나는 괜시리 책임감을 느꼈다.

"ㅋㅋ 걱정 말어라~ 곧 갈거니까 쫌만 기둘려라"

그 날은 평소보다 더 열심히 가르쳐주고, 더 많이 살펴주고, 더 많이 때려주었더랬다.


#2.

매일 오후 3시 15분이 되면 전화를 걸어 밝은 목소리로 날 반겨주는 영어선생님 Grei. 수업 시간이면 항상 안부를 묻고 교재의 내용이 어떤 것이며 정해진 질문을 하고 틀린 걸 체크해주는 routine이 반복된다. 오늘도 그러겠거니, 교재를 읽고 수업 준비를 했는데 이게 웬걸, 요새 무슨 영화 보는지에 대해서 free talking을 하는 것이었더랬다. 내 입장에서야 뻔한 수업 진행하는 것보다 낫긴 한데, 혹시라도 그녀가 수업하는 게 귀찮아서 이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이 끝날 무렵 그녀는 말했다, 앞으로 매주 월요일은 free talking day라고, 이건 너의 말 더듬고 "Uhm......"거리는 습관을 고쳐주기 위함이라고. 하루에 수십통의 전화를 거는 Grei가 선생님으로서 날 특별히 지켜보고 신경써주는구나, 라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3.

나는 늘 생각한다. 내게 어떤 복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내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고, 날 많이 배려해준다고. 그리고 또 생각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처럼 행동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과연 이런 배려를 받을 만한 좋은 사람인가.

by ClauXewitz | 2008/07/21 17:02 | My Life | 트랙백 | 덧글(2)

20080718

집에 있는 컴퓨터님하께서 시퍼런 얼굴로 드러누운지가 벌써 열흘째다. 처음 사나흘은 귀찮아서 내버려뒀다가, 소리바다 오르골 접속을 남들 싸이하듯 맛들이신 아버지로부터, 너 그렇게 게을러서 큰 일 못한다는 부탁과 협박의 오묘한 경계를 가로지르는 명령을 이어받아, 만병통치약 윈도우CD를 구해다가 하드를 열심히 갈아엎으려 했더랬다. 포맷하는 중입니다. 5%, 20%, 50%, 75%, 이제 다시 깔면 되겠쿠나, 하는 순간, 포맷하지 못했습니다 파티션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며 컴퓨터님하는 또다시 뻗어버렸다. 이거 뭥미, 하면서 아무리 다시 시도해봐야 전력만 낭비된다. 나의 구세주 윈도우CD가 어린 양의 손길을 뿌리치고야 만 것이다. 일기 좀 열심히 써보려는 건실청년 ClauXewitz에게 있어서 삶은 이토록 부조리하다.

by ClauXewitz | 2008/07/18 10:21 | My Life | 트랙백 | 덧글(6)

레몬 트리(Etz Limon, 2008)

#0.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경계에서 레몬 농장을 가꾸며 살아가던 팔레스타인 여인 살마(히암 압바스). 어느 날 그녀의 집 근처에 이스라엘 국방장관 부부가 이사를 온다. 그리고 며칠 뒤 그녀는 장관 부부의 안전을 위해 레몬 농장을 없애야 한다는 통보를 받는다. 더없이 소중한 레몬 나무를 지키기 위한 살마의 저항이 <레몬 트리>의 이야기의 중심을 이룬다.


#1.

사실 예전에는 영화나 드라마 속 주인공이 모든 것을 걸고라도 지켜야 할 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 때 같았으면 <레몬 트리>를 보면서, 그냥 적당히 보상금 받고 끝내지 뭐하러 저렇게 하냐, 라는 무미건조한 반응으로 일관했을 것이다. 어디에 가도 마냥 어리다고 하기엔 어색해져버린 지금에 이르러, 그들의 행동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지금의 정부가 제 2의 문화 혁명이랍시고 내가 자주 즐겨찾는 스폰지하우스, 씨네큐브, 하이퍼텍 나다 같은 소규모 극장들을 폐쇄한다는 결정을 내린다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것들을 지키려 노력할 것이다. 그들과 함께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고작 1년 남짓한 시간이 날 그렇게 만들어줄텐데, 하물며 자신의 삶이 오롯이 엮인 레몬 나무를 지키려는 살마는 오죽할까. 살마에게 있어서 어릴 적부터 함께 해온 레몬 나무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그렇기에 미국으로 건너오라는 아들의 말을 거절하고, 보상금까지 약속한 이스라엘 정부를 상대로, 비록 패배로 끝났지만 끈질기게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라는 배경의 특성상, 양자 간의 관계로 영화를 해석해내기 쉽다. 실제로 자기의 것이었던 레몬 농장을, 철조망을 건너 남의 땅 침범하듯 들어가야만 하는 상황이나, 마지막에 잘려나간 레몬 나무들을 그저 멍하게 바라보는 살마의 눈에서, 수 천년동안 살아온 땅을 하루아침에 유태인들에게 빼앗긴 팔레스타인의 역사가 담겨있는 듯하다. 그러나 <레몬 트리>는 단순히 민족 간의 대립에서 머무르는 것을 넘어서, 개인과 구조의 대립이라는 더 큰 주제를 끌어안고 있다. 팔레스타인 여인 살마는 이스라엘 정부를 상대로 레몬 나무를 지키려는 투쟁을 전개하는 것 못지 않게,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명목으로 여성의 사랑할 자유를 침해하고 있는 이슬람 사회의 관습으로 인한, 보이지 않는 내적 갈등을 견뎌내야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정부와 이슬람 사회라는 두 개의 거대한 구조와 동시에 맞서고 있는 살마의 모습을 통해, 거대한 "구조"에서 벗어나 "개인" 혹은 "공동체"로 돌아가자는 메시지가 투영된다. 이는 국방 장관의 아내인 미라(로나 리파즈-미셸)에게서도 잘 드러난다. 마음으로는 살마의 처지를 동정하고 공감하지만, 국방 장관의 아내라는 구조적 신분으로 인해 뜻대로 행동할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경호원으로 둘러싸인 그녀의 집은, 실은 그녀의 발을 묶는 하나의 거대한 성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법원에서의 그녀들의 조우는 거대한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사나이의 그것과 같이, 인상적이다.


#3.

히암 압바스와 로나 리파즈-미셸. 두 중년 여인을 향해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내 아내가 늙는다면 저런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녹록치 않았을 법한 삶을 거쳐 거듭난 그들의 아름다움은 젊은 여성의 그것에 비할 바가 못된다.




by ClauXewitz | 2008/07/14 17:21 | filled with Movies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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